[이병록의 신대동여지도] 전북 부안의 돌 문화부안은 넓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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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oreo 댓글 0건 조회 2회 작성일 25-06-16 19:38본문
[이병록의 신대동여지도] 전북 부안의 돌 문화부안은 넓은 벌판과 바다를 낀 지역이라 고암리 고인돌처럼 예로부터 마을이 형성된 지역이다. 부안이란 지금의 이름은 태종1 6년(1416) 부령(扶寧)의 부(扶)자와 보안(保安)의 안(安)자를 따서 지은 부안현(扶安顯)이 지금까지 계속된다. 보안의 전신인 희안(喜安)은 신라 경덕왕 16년(757)부터 이름이고, 고려 때에 희안현을 보안현(保安顯)이라 고쳐 부르게 된 긴 역사를 가지고 있다.올해 4월에 자전거로 여행하다 넘어져 다친 뒤에 두 달 만에 다시 준비하고 간다. 본격적인 여행 중에 가장 많이 준비하고 간 곳이나 다녀와서 보니 준비가 부족했다. 6월 현충일 연휴로 버스표 매진으로 11시 반에 출발하는 버스를 탔다. 시골은 통상 버스가 빨리 끊기니, 구암리와 개암사 중에서 어디를 먼저 갈까가 고민이다. 구암리가 버스정류장에서 더 가깝고, 또 버스가 바로 연결된다.유홍준 작가 <나의 문화유산 답사기>에 따르면 구암리 고인돌 10기는 백영기 씨 댁 마당에 있는 것으로 나와 있다. 그래서 현재 사는 집 마당에 있는 오래된 고인돌이라는 상상에 큰 기대를 걸고 이번 여행에서 가야 할 1순위다. 지금은 담장으로 둘러싸여 보존하면서 공원화되어 있다. ▲ 부안 구암리 고인돌고인돌 과거에는 집 마당에 있었는 모양인데, 지금은 공원화되어 고인돌 10기를 보존하고 있다. ⓒ 이병록본래 13기가 있었다는데, 늦게나마 소 잃고 외양간이라도 고치면 다음 소는 잃지 않는다. 그래도 마을 중앙에 집들 사이에 자리하고 있어, 고대와 현대의 사람이 공존하고 있는 고인돌이다. 큰 고인돌은 6.4x4.5x0.8m로 매우 크고, 작은 받침돌이 8개나 있는 고인돌도 있다.장승은 마을의 수호신으로 이정표와 경계표시 몫까지 갖고 있고, 솟대는 성역의 상징이다. 마한 시대에 솟대에 죄지은 자가 있어도 이곳에 들어가면 잡지 못했다. 독재 시대에 명동 성당이 그런 역할을 했다. 대전 괴정동에서 출토된 솟대 그림의 청동제기가 뒷받침해 주듯이 2천 년 이상의 전통을 갖고 있다.중요민속자료 제18호인 부안 서문안 당산도 가야 할 1순위인데, 구암리 고인돌을 보고 오는 길 끝에 있다. 이 당산은 조선 숙종 15년(1689)에 만들어졌고, 서문으로 통하는 길 양편에 서 있던 것을 1980년 현재의 할머니 당의 자리로 옮겨서 한 줄을 이루고 있다.행간을 읽으면 당산인 돌기둥(솟대)에도 남녀가 있고, 할아버지와 할머니 당이 떨어져 있었다는 것이[이병록의 신대동여지도] 전북 부안의 돌 문화부안은 넓은 벌판과 바다를 낀 지역이라 고암리 고인돌처럼 예로부터 마을이 형성된 지역이다. 부안이란 지금의 이름은 태종1 6년(1416) 부령(扶寧)의 부(扶)자와 보안(保安)의 안(安)자를 따서 지은 부안현(扶安顯)이 지금까지 계속된다. 보안의 전신인 희안(喜安)은 신라 경덕왕 16년(757)부터 이름이고, 고려 때에 희안현을 보안현(保安顯)이라 고쳐 부르게 된 긴 역사를 가지고 있다.올해 4월에 자전거로 여행하다 넘어져 다친 뒤에 두 달 만에 다시 준비하고 간다. 본격적인 여행 중에 가장 많이 준비하고 간 곳이나 다녀와서 보니 준비가 부족했다. 6월 현충일 연휴로 버스표 매진으로 11시 반에 출발하는 버스를 탔다. 시골은 통상 버스가 빨리 끊기니, 구암리와 개암사 중에서 어디를 먼저 갈까가 고민이다. 구암리가 버스정류장에서 더 가깝고, 또 버스가 바로 연결된다.유홍준 작가 <나의 문화유산 답사기>에 따르면 구암리 고인돌 10기는 백영기 씨 댁 마당에 있는 것으로 나와 있다. 그래서 현재 사는 집 마당에 있는 오래된 고인돌이라는 상상에 큰 기대를 걸고 이번 여행에서 가야 할 1순위다. 지금은 담장으로 둘러싸여 보존하면서 공원화되어 있다. ▲ 부안 구암리 고인돌고인돌 과거에는 집 마당에 있었는 모양인데, 지금은 공원화되어 고인돌 10기를 보존하고 있다. ⓒ 이병록본래 13기가 있었다는데, 늦게나마 소 잃고 외양간이라도 고치면 다음 소는 잃지 않는다. 그래도 마을 중앙에 집들 사이에 자리하고 있어, 고대와 현대의 사람이 공존하고 있는 고인돌이다. 큰 고인돌은 6.4x4.5x0.8m로 매우 크고, 작은 받침돌이 8개나 있는 고인돌도 있다.장승은 마을의 수호신으로 이정표와 경계표시 몫까지 갖고 있고, 솟대는 성역의 상징이다. 마한 시대에 솟대에 죄지은 자가 있어도 이곳에 들어가면 잡지 못했다. 독재 시대에 명동 성당이 그런 역할을 했다. 대전 괴정동에서 출토된 솟대 그림의 청동제기가 뒷받침해 주듯이 2천 년 이상의 전통을 갖고 있다.중요민속자료 제18호인 부안 서문안 당산도 가야 할 1순위인데, 구암리 고인돌을 보고 오는 길 끝에 있다. 이 당산은 조선 숙종 15년(1689)에 만들어졌고, 서문으로 통하는 길 양편에 서 있던 것을 1980년 현재의 할머니 당의 자리로 옮겨서 한 줄을 이루고 있다.행간을 읽으면 당산인 돌기둥(솟대)에도 남녀가 있고, 할아버지와 할머니 당이 떨어져 있었다는 것이다. 할머니 당은 윗부분이 남아 있지 않아서 할아버지 당의 절반이다. 키 큰 할아버지와 키가 작은 할머니가 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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