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은 읍성의 나라였다. 어지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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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afht43oso 댓글 0건 조회 1회 작성일 25-06-07 19:44본문
조선은 읍성의 나라였다. 어지간한 고을마다 성곽으로 둘러싸인 읍성이 있었다. 하지만 식민지와 근대화를 거치면서 대부분 훼철되어 사라져 버렸다. 읍성은 조상의 애환이 담긴 곳이다. 그 안에서 행정과 군사, 문화와 예술이 펼쳐졌으며 백성은 삶을 이어갔다. 지방 고유문화가 꽃을 피웠고 그 명맥이 지금까지 이어져 전해지고 있다. 현존하는 읍성을 찾아 우리 도시의 시원을 되짚어 보고, 각 지방의 역사와 문화를 음미해 보고자 한다. <기자말>[이영천 기자]이름부터 '禿山(독산)'이라니 본시 민둥산이었을까? 아니면 산성 기능을 극대화하려 수목을 모두 베어버렸기 때문일까? 후자일 개연성이 높다. 혹자는 항아리를 닮아 그리 부른다는데, 내 눈엔 글쎄다. 산성은 독산 꼭대기에 앉았다. 성은 단지 긴요한 길목에 앉았을 뿐이다. 이게 독산성의 존재 이유다. 삼국시대부터 한강 유역에서 삼남으로 들고나는 길목이다. 옛날에도 그러했듯, 지금도 국도 1호선을 비롯하여 철도며 고속도로에 넋이 나갈 지경이다. ▲ 화성-융건릉-독산성(1872년지방지도_수원부_부분)화성에서 남쪽으로 융건릉(약 8 km)이 있고, 황구지천을 건너면 독산성(약 4 km)이 자리한다. 화성 장안문~팔달문~안녕으로 이어지는 붉은 실선이 옛 삼남대로다.ⓒ 서울대학교_규장각_한국학연구원 근동은 온통 도시화해 번잡함 그 자체다. 그 안에서 삼남대로 옛길을 그려 본다. 천안에서 수원에 이르는 그야말로 길의 목이다. 수원을 지나면 과천이고 거기서 한강을 건너면 곧장 도성이다. 화성(華城)이 18세기 후반에야 쌓였으니, 도성 아래 삼남대로의 첫 성곽이었던 셈이다. ▲ 융건릉과 용주사독산성 동문 치성에서 바라 본 삼남대로 쪽 모습. 사진 중앙 왼쪽이 융건릉 숲이고, 그 옆 오른쪽 숲에 용주사가 자리한다. 사방이 일망무제다.ⓒ 이영천 남으론 오산과 향남이, 동쪽엔 동탄이, 북으로 병점과 수원이 손에 잡힐 듯하다. 이름 그대로 벌거숭이 산이라면 이만한 전망이 또 있을까. 지금이야 사방이 아파트에 가려 버렸지만, 눈으로 직 최근 숨진 채 발견된 주둥이 기형 돌고래 ‘턱이’. 제주대학교 고래·해양생물보전연구센터·다큐제주 제공 구강암을 앓아 입을 다물지 못하면서도 생존해오며 많은 이들에 영감을 줬던 제주 남방큰돌고개 ‘턱이’의 사체가 발견됐다.5일 제주대 고래·해양생물보전연구센터 김병엽 교수와 다큐제주 오승목 감독에 따르면 지난 2일 제주 서귀포시 중문 앞바다에서 남방큰돌고래 ‘턱이’가 숨진 채 발견됐다.턱이는 죽기 전 날에도 대정읍 무릉리 앞바다에서 비교적 괜찮은 활동 모습으로 유영하는 것이 관찰됐다.턱이는 2019년 발견 당시 주둥이가 틀어진 채 닫지 못해 혀가 돌출되는 등 기형 형태여서 ‘턱이’로 이름지어졌다.오 감독 등의 추적 연구 결과 턱이는 7년간 생존을 위해 비교적 잡기 쉬우면서 서귀포시 서남부 일대 양어장 근처에서 구하기 쉬운 넙치를 주 먹이로 살아 온 것으로 조사됐다.하지만 몸집이 큰 사냥감인 경우 턱의 기능이 상실된 턱이로서는 이빨로 절단할 수 없어 힘겨운 생존 투쟁을 벌여왔던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오 감독은 “7년 전 발견 당시에도 구강암을 앓았던 것으로 추정되며 상당기간 투병한 것으로 보인다”며 “정확한 나이는 알 수 없지만, 턱이의 강인한 모습은 지켜보는 연구자나 시민들에게는 장애를 극복하는 희망의 상징이었다”고 말했다.박준우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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